장사꾼 여불위(呂不韋)의 사생아 진 시황제(1/2)

중국 천하통일 든든한 토대를 만든 여불위

정병태 교수 | 기사입력 2021/02/09 [16:18]

장사꾼 여불위(呂不韋)의 사생아 진 시황제(1/2)

중국 천하통일 든든한 토대를 만든 여불위

정병태 교수 | 입력 : 2021/02/09 [16:18]

 [강건문화뉴스=정병태 수석기자]

기원전 221, 진 시황제가 6(,,,,,)을 통일하자()=중국(中國)’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현대 중국에서는=중국이란 등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진()나라를 멸하고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도한족(漢族)=중국인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중국인들이 최초의 천하통일 진왕조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그 원인을 맹자는 천하가 결국하나로 통일(定于一정우일)’될 것이라 말하였다.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만이 천하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을 것(不嗜殺人 者能一之불기살인 자능일지)’이라고 주장했다. 순자왕패(王覇)’에서도 말하기를 천하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을 왕이라 하고, 천하 백성에게 버림받는 것을 멸망이라 한다.”진나라가 폭군임을 보여주는 장평전투에서 이미 항복한 40만 적군을 잔인하게 살해한 진()나라군은 과연 의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들어보았는가?

 

혹시 진 시황제(秦始皇帝)의 성씨와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성은 영()이고 이름은 정()이며 씨는 조()이다. 그러므로 원래 이름은 조정(趙政)이다.

 

▲ 중국 '진 시황제' 서적 표지  © 정병태 수석기자

 

기원전 213년 진 시황제 46세에 장수를 기원하는 행사에서 박사인 제나라 사람 순우월의 간언에 화가 나자 진나라의 몇 분야 중요 서적을 제외하고는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진 시황제 왈 감히 옛것으로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저잣거리에서 죽여 보이겠다.”또 학자와 도사들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령하였으나 구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는 학자들과 유생 460여 명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다.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이를 합쳐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사로운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맘에 안든다 하여 모조리 생매장시켰다는 의미이다. 누가 봐도 폭군정치였다. 이러한 잘못을 알고 있던 장남 영부소(嬴扶蘇)는 시황제의 분서갱유에 간언했다가 변방으로 보내어진다. 영부소는 총명하여 많은 중신들로부터 장래를 촉망 받았다. 결국 BC 210년에 순행 중이던 시황제가 급사하자, 시황제의 상()을 주관하던 환관 조고(趙高)와 승상 이사(李斯)가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막내 호해(胡亥)를 옹립해 황제로 받들 것을 결의하고 영부소에게는 자해를 권하는 거짓 성지를 내렸다. 영부소는 성지 내용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각해보건대, 폭군 진 시황제하면 얼핏,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는데 동원된 인부가 무려 150만 명이나 되었고, 시황제의 아방궁을 700여 채를 지도록 하였고, 자신의 능묘와 병마용갱을 건설하도록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공사로 죽은 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었다. 진 시황제는 자기만 옳다고 여겨 남에게 묻지 않았고, 잘못을 하고도 고칠 줄 몰랐다. 재위기간 다섯 번이나 전국 순행을 하였다(과시). 결국 50세 나이로 마차에서 순행 중 죽게 된다.

그의 폭정으로 많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고 죽음으로 내몰렸으며 수많은 범법자가 양산되었다. 시골에는 농사를 지을 남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봐야 진 시황제가 자리에 있었던 기간은 고작 40여 년 동안뿐이었다.

 

진나라가 이렇게 천하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백성들의 순응과 천하가 끊임없는 전쟁으로 불후의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천하통일 든든한 토대를 만든 여불위의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전의 지적 유산 사기(史記)

 

탈무드가 유대인들의 지적 유산이듯이 앞으로 최고의 자산은 쌓아온 지식과 미래의 지혜가 될 것이다. 고전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공부하는 것은 최고의 지적 탐구이다. 사기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되, 진 시황제는 여섯 제후국을 평정하고 역사상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루었지만 진나라는 결국 단명 왕조로 끝나고 만다.

사기(史記)는 사마천이 사관인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에 따르고자 궁형의 치욕을 딛고 저술한 역사서이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지 20년 만에 집필을 완성하고 몇 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적 역사서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중국 역사의 탄생부터 사마천이 살던 당대의 제왕인 한 무제까지 다루고 있다. 사기(史記)는 총 130526500자에 이른다. 2600여 년의 중국 역사적 변천을 중심으로 하여 서술하였다. 특히 <진시황 본기>에서는 40여 년의 중대한 정치적 사건, 천하통일 이면의 복잡한 상황과 진나라의 강성함 그리고 진 시황제의 탐욕과 교만 등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었다. 진 시황제는 지난친 자신감과 자만에 빠져 끊임없는 정복욕에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여불위(呂不韋)의 사생아 진 시황제

 

▲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92~235)는 조(趙)나라 출신의 상인  © 정병태 수석기자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을 꼽으라면 당연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룬 진 시황제이다. 그런데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진 시황제의 출생이 당대 거상 여불위(呂不韋)의 사생아라고 밝히고 있다(여불위전).

여불위는 대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위나라의 기운이 기울고 있음을 알고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자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여불위가 사업차 조나라 수도 한단에 진 소왕의 손자가 인질로 보내어진 자초(子楚)를 만나게 되었다. 여불위는 자초를 보는 순간, 그에게 전부를 건 투자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이 찾아 헤매던 최고의 투자상품임을 확신했다.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한 끝에 곧 자초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여불위는 조희라는 여인과 사귀고 있었는데, 조희는 매우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춤과 노래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자초는 술자리에서 조희의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결국 여불위는 가능성이 없던 진나라의 왕자를 황제로 만든다.

 

▲ 여불위가 식객 3000명에게 저술을 맡겨 편찬했다는‘여씨춘추(呂氏春秋)’  © 정병태 수석기자

 

여불위가 거느린 식객이 무려 3,000명이나 되었고, 여씨춘추를 발간했고, 상인출신으로 상국(국무총리)의 벼슬을 얻게 된다. 그는 전국의 나라를 대상으로 무역을 하다보니 정보도 빠르고 각 나라의 정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판단력이 남달랐다. 13세의 어린 태자 영정(嬴政)이 왕위에 올랐다. 여불위는 재상으로 지낸 12년 동안 진나라의 모든 군정대권을 장악했다. 중국 최초의 천하통일의 성과에서 여불위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역사학자들은 여불위가 없었다면 진나라 역사에 이렇게 찬란한 업적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여불위는 사람과 사물은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남의 장점을 배우거나 이용해 자신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성공을 거두고, 나아가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여씨춘추 맹하기 용중)

여불위는 각국 인재들을 진나라로 끌어들이고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여 만들어 낸 정책 덕에 진나라 문화발전사에 있어 위대한 쾌거라 할 수 있다. <여씨춘추>는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위한 사상, 문화적 든든한 기반을 제공했다.

이처럼 여불위이라는 인재의 덕목과 다양한 인재 발굴의 결과이다. 그러면서 성장할 인재에게 투자는 최고 수익을 거두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 시황제가 되기까지

 

진 시황제의 아버지 자초(子楚)가 진나라의 왕의 자리에 올랐다(장양왕莊襄王, 기원전 281~246). 원래 초명은 영이인(嬴異人)이었다. 그는 조나라에 인질이 되어 있었고 할아버지 소양왕(昭襄王)이 조나라을 공격하였다. 그때 한나라의 상인으로 후에 진나라의 승상이 된 여불위가 거금 600금을 감시인에게 뇌물로 주고 조나라를 탈출해 진나라 군대의 군영으로 가게 된다. 조나라에 남아있던 가족들을 죽이려 했지만 영자초의 부인은 조나라 호족의 딸이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여불위는 영이인에게 초나라의 옷을 입게 하였고 초나라 화양부인에게 잘 보이게 되어 이름을 자초(子楚)로 고쳐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소양왕이 사망하자 자초도 양어머니 화양부인과의 약속에 따라 진나라의 태자에 오른다.

자초의 아버지 효문왕이 1년간의 소양왕의 장례를 마치고 정식으로 즉위한 지 겨우 3일 만에 세상을 뜨게 되어 자초(B.C 281-247)는 진나라의 30대 왕이 된다. 왕이 된 자초는 아들 영정(嬴政)을 태자로 삼고 자신의 후원자 여불위를 승상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로 봉해 하남(河南) 낙양(雒陽) 지역 식읍 10만호를 하사한다. 그러나 장양왕 3(기원전 247)에 장양왕은 사망하고, 13세 아들 영정(嬴政)이 진나라 왕의 자리를 잇는다. 이때 이미 진나라는 천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불위의 첩 조희(趙姬, 기원전 259-247)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태후로, 진나라 장양왕의 부인이자 진 시황제의 생모이다. ()나라 출신으로, 본래 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첩으로 장양왕에게 바쳤고 자초의 부인이 되었다. 자초부인(子楚夫人)이라고도 한다.

 

▲ 진 시황제(秦始皇帝)중국 천하를 처음으로 통일한 황제

이미지 출처: //nimg.ws.126.net/?url=http%3A%2F%2Fdingyue.ws.126.net%2F2019%2F1130%2F9137397aj00q1riuv001cc000b600cim.jpg&thumbnail=650x2147483647&quality=80&type=jpg  © 정병태 수석기자

 

황제라는 단어를 만든 남자

 

진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210 50)는 전국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제1대 황제로, 세계 최초의 황제이다. 성은 영(), 이름은 정() 혹 조정(趙政)이다. 씨는 진(), 또는 조()이다. 영정(嬴政)은 장양왕과 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사기(史記)‘여불위열전에서는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정치적 목적에서 조희가 자신의 아들을 임신한 것을 숨겼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13살의 나이로 진나라 왕이 된 영정(嬴政)은 어려서 친정을 할 수 없었고, 이에 장양왕의 후원자 여불위와 어머니 조태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일설에는 조태후가 여불위와 불륜관계였고 여불위는 진왕 영정이 성장해가며 두려움을 느끼자 조태후에게 노애를 대신 소개시켜주었다. 노애는 환관으로 위장해 조태후와 불륜관계를 이어가면서 아이까지 생기자 그 아이를 진왕으로 만들기 위해 반란을 계획했다. 여불위가 노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성공한다.

결국 어머니 조태후와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에 연루된 혐의가 발견되자 진시황은 본격적으로 숙청을 시작해 우선 어머니 조태후는 옹땅에 1년간 유배시켰고, 여불위는 시황 10년에 면직시키고 시황 12년 여불위는 사망하게 된다.

 

 

만세(萬世)까지 황제라 부르라

 

진 시황제는 왕의 자리에 오른 지 26년 만에 처음으로 천하를 합병하여 36개의 군을 만들었으며, 국왕(國王)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황제(皇帝)라 칭하기로 하였고, 자신은 황제의 자리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시황제가 죽자 아들 호해가 제위에 오르니 바로 이세황제(秦 二世皇帝, 기원전 229~207)이다. 그리고 마지막 왕호로는 항왕(降王)이다. 영부소의 아들 영자영은 진나라 황제 칭호를 포기하긴 했지만 후대인들이 삼세황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자영(子嬰)은 유방의 군대에게 장례식을 상징하는 백마가 끄는 흰 마차, 흰 소복을 입고 목에는 전국옥새를 걸고서 유방에게 항복하게 되는데 즉위한 지 45일 만이었다. 유방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자영과 그 일족의 안전을 보장했지만, 뒤늦게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진시황이 각국을 멸망시킨 죄 등을 물어서 진왕 자영과 일족을 처형시켰으며 자영의 죽음으로 진나라 황족의 대는 완전히 멸족 당한다(시황 본기).

시황제는 후세부터는 수를 세어 이세, 삼세, 사세에서 만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하도록 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초대 황제 유방이 진나라를 멸하고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세운 한()나라가 천하를 다스린다. 서기 220년까지 400년 넘게 존속된 대제국으로 번창하게 된다. 한왕조(漢王朝)를 건설한 유방은 농부의 아들인 평민출신이었다.

 

 

불로불사의 꿈

 

진 시황제가 불로불사약을 너무나도 간절히 원했다. 한종, 후공, 석생을 시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는 신선의 약을 구하게 했다. 결국 시황제는 불로불사약인 줄 알고 먹고 자신의 생명까지 단축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수은이다. 진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전국 순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병이 악화되어 50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2부는 다음에 이어서)


강건문화뉴스 정병태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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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347.3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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